나의 첫 고양이 꼬미


    우리가 전에 살던 집 모퉁이에 있던 도시락집은 배달원과 조리사로 언제나 북적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소란스러운 풍경 사이에 세상사와 전혀 무관한 얼굴로 앉아 있는 얼룩 고양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내 생애 처음으로 챙기기 시작한 길고양이 꼬미다. 꼬미라는 이름은 우리가 붙여줬다. 동네에서 꼬미를 보고 '야미'라고 부르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걸 보면 꼬미는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도시락집 이름이 야미가여서 야미라고 불렸던 것 같다.) 그렇게 꼬미와 우리는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가까워졌다. 


(도시락집 오토바이 옆에 늘 이 모습으로 앉아있던 꼬미)


    꼬미가 꼬미가 된 이후로 내게 고양이는 꼬미뿐이었다. 어디선가 다른 고양이를 봐도 꼬미가 떠올랐고, 고양이 영상을 볼 때도 꼬미가 생각났다. 꼬미는 내 생활에 그렇게 스며들었다. 그럼 꼬미의 생활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정도일까? 문득 꼬미의 생활도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꼬미의 끼니를 걱정하게 됐다. 나는 몇 번 길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이던 꼬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게 꼬미가 큰 의미인 것처럼, 꼬미의 묘생에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보협의 길고양이용 사료 공구에도 참여하고, 구내염 예방에 좋다는 캔사료도 사보게 되었다. 

    길고양이 한마리를 돌보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품이 들었다. 사료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쓰고, 늘 비슷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챙겨주는 일 뿐이었지만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가 한 장소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밥 때가 되면 30분에서 1시간씩 돌아다니며 아이를 찾아다녀야했고, 결국 못 찾은 날엔 밥을 어디에 두고 가야 아이가 찾아서 먹을 수 있을지 고심하느라 또 얼마간의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이 일도 여름엔 할 만했지만 겨울엔 추위와도 싸워야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또, 동거인과 나는 동시에 다른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 혹여나 그런 날이 있더라도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꼬미와의 약속 시간인 10시 전에 귀가해야했다. 퇴근 후의 일정이 꼬미에게 맞춰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 비장한 결심까진 아니더라도 내 생활에 대한 일정 부분의 포기가 필요했다. 고양이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더 단단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게 바로 길고양이를 돌보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밥을 기다리던 꼬미)


    당시 우리가 즐겨보던 유튜브 영상 중엔 길고양이를 돌보는 장면만을 올리는 채널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아이들 약도 챙겨주고, 사료도 주는 좋은 분이었는데 왠지 모를 동질감에 일부러 더 자주 챙겨봤던 것 같다. 그 분 영상에는 '광고를 더 달아달라'거나 '광고를 스킵하지 않고 다 봤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리곤 했는데, 나도 그 분이 돌보는 길고양이에게 보탬이 될까 그 분 영상에 달린 광고는 넘기지 않고 다 봤다. 고양이를 매개로 하여 형성된 신기한 신뢰였다. 

    그 분 영상에는 가끔 벌러덩 드러누워 사람을 향한 애정을 과시하는 고양이들이 등장했다. 내겐 그런 모습이 생경했는데, 꼬미는 우리에게 1m 이내로 다가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밥 그릇을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놔줘야 겨우 먹기 시작했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밥 그릇에서 멀어졌다. 꼬미는 우리와 소통을 하기 위해 운 적도 없었다. 꼬미가 하는 거라곤 그저 무언가 요구하는 듯한 자세로 앉아 밥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유튜브에서 구독자수가 많은 고양이 채널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특이한 종일 것 2. 애교가 많을 것 3. 천방지축 말썽꾸러기이거나 웃긴 고양이일 것(단, 고양이의 행동이 공격적이어서는 안됐다). 물론 집사의 영상 편집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출연하는 고양이가 이 중 한 가지 이상의 특징을 가져야 채널이 흥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채널의 집사나 구독자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도 내가 보기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유튜브를 볼 때에도 동물들이 짝짓기를 하는 모습이나 배설을 하는 모습은 건너 뛰었고,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나 유독 좀 못나보이고 아파보이는 아이들이 등장하면 가슴 아프다는 핑계로 영상을 꺼버렸다. 부끄럽게도 당시의 나는 동물을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 꼬미가 유튜브 속 아이들처럼 살갑지 않은 것에 서운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꼬미가 우리에게 살갑게 굴 이유도, 무언가를 해줄 이유도 없었는데 말이다. 꼬미 입장에서 우리는 갑자기 자신의 세계에 출현한 방해자일 뿐이었다. 꼬미가 머물던 시간과 장소에 침범한 우리를 눈감아주는건 우리가 밥을 챙겨주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아이의 그 넉넉한 마음에 고마워졌다. 우리 앞에서 배를 보이며 벌러덩 드러눕지 않아도, 귀여운 소리로 우리를 부르지 않아도 꼬미는 꼬미 방식대로 우리를 환대해주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엔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기도 했다. 이종(異種)의 만남에선 말도 몸짓도 통하지 않으니 확신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꼬미가 우리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길냥이 집을 만들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는 꼬미)


    이제 꼬미는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갈라놓을 어떤 시련도 없을거라 믿었고,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꼬미를 데려갈 계획도 세우며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았다. 꼬미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채 내멋대로 세운 계획이었지만 우리는 좋은 가족이 될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기대를 비웃는듯 내게 시련이 찾아왔다. 꼬미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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