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1 : 생리컵

올해 여름(정확히는 7월 19일) 햄튜브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영업을 당한 나는 햄튜브님의 것과 동일한 생리컵을 주문했다. 다원컵이란 곳이었는데, 외국에서 배송된다는 점이 맘에 걸렸지만 때마침 50% 세일도 했고, 구성도 좋아서(S+L사이즈 세트) 그냥 주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사기를 당했다.

사기를 당했다는건 10월 마지막주쯤 알았다. 배송이 지나치게 지연되니 사기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은게 9월 중순부터였는데, 계속 부정하고 외면하느라 사실을 늦게 직면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참고로 나는 타인을 굉장히 잘 믿는 성향 탓에 여러 가지 불행을 겪어 온 전적이 있다. 게다가 쓸데없이 인내심도 좋다.)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공지는 올라오지 않은지 한참이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업자번호 하나 없었다. 본사가 영국에 있어 그런건가 싶기도 하고 긴가민가해서 블로그 후기를 찾아봤더니 사람들이 모두 다원컵을 욕하고 있었다.... 그냥 욕도 아니고 정말 개쌍욕을..

11월엔 어찌저찌 다원컵 피해자 모임방에 들어갔다. 다들 답답한 마음으로 생리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보다 오래 기다린 피해자 중엔 4월에 주문한 이도 있었다. 처음엔 피해자들의 사례를 보며 빡쳐하다가 점차 알 수 없는 소속감인지 동지애인지를 느끼며 생리컵 따위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이 올리는 자학짤들도 내겐 길티플레져였고 꽤 즐거웠다.(피해자분들 죄송합니다. 지금은 저도 다원컵 대표 멱살 잡고 싶어요).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뿐은 아닌듯했다. 억울한 사연으로 모였으면서 피해가 해소된 후의 파티를 생각할 여유를 가진 흥의 민족.. 아무튼 다원컵을 향한 피해자들의 원성이 치솟고, 총대가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할 즈음 나는 단톡방에서 나왔다. 상담원은 한 번 문의하면 함흥차사였고, 상황이 이러니 환불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내심은 많지만 포기는 빠른, 진짜 우스운 사람이었다.

아니 어떻게 나한테 사기를 칠 수 있지? 종종 내가 짜증을 낼 때마다 남자친구는 그게 어떻게 사기가 아닐 수 있느냐는 얄미운 반문을 했다. 그치.. 너무 오래 기다리긴 했지.. 하지만 계속 스스로를 탓할 순 없으니 다원컵 욕을 사방팔방에 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지나가 루나컵 L스펙 괜찮으면 써보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대박사건!

지나가 준 생리컵은 L사이즈인데도 내 예상보단 작았다. 언리밋 갔을 때 생리컵 구경 제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묵직한 느낌에 탄성이 좋았다. 꽤 단단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접어서 질에 넣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 첫 시도는 생리 첫 날 밤, 집에서였다. 생리컵을 끓는 물에 소독하고 찬물로 다시 헹군 후에, 물기가 남아있는 상태로 화장실에 갔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질 입구를 적신 다음, 사타구니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등은 뒤로 조금 젖힌 채 펀치다운 방식으로 밀어 넣었다. 사실 공공화장실에서도 이용하려면 변기에 앉은 상태에서 첫 시도를 해봤어야 했는데, 겁이 나서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다. 생리컵은 의외로 쉽게 들어갔는데, 문제는 꼬리였다. 꼬리가 반쯤 밖으로 튀어나와 꽤 거슬렸다. 후기들을 찾아보니 꼬리에 살이 쓸려 상처가 날 수도 있으므로 자르는게 좋다는 조언이 많았다. 그래서 바로 절반을 잘라냈다(대박 팔랑귀).

다음날 아침, 출근 전에 집에서 한 번 헹구고 다시 넣는게 좋을 것 같아 생리컵 빼기를 시도했다. 쩔쩔매며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질에 손가락을 쑤셔넣기를 1시간.. 내가 끙끙대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려퍼져서 되돌아올 뿐 그 어떤 소득도 없었다. 결국 그대로 출근을 해야 했다. 지하철에선 독성쇼크증후군에 대해 찾아봤다. 만약 계속 실패하면 병원에 가서 빼달라고 해야 할텐데.. 이것 때문에 산부인과에 가는 일을 상상하니 짜증이 났다. 꼬리.. 어제 자른 꼬리를 다시 이어 붙이고 싶었다. 왜 내가 그렇게 화끈하게 꼬리를 잘랐을까..? 오늘의 나는 왜 늘 어제의 나를 모르는걸까..

다행히 회사의 화장실은 세면대와 변기가 붙어있는 형태로, 시간을 두고 다시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지나의 조언대로, 혈 덩어리를 일부러 밀어내려고 할 때처럼 힘을 줬더니 생리컵이 조금 밀려나왔다. 그 상태에서 꼬리를 엄지와 중지로 잡고, 검지를 질 안쪽으로 넣어서 생리컵을 살짝 힘주어 눌렀다. 꼬리를 조금씩 흔들면서 동시에 배 아래쪽에 힘을 주고 있자니 왠지 똥도 나올 것 같고 너무 괴로웠지만 결국은 해냈다. 넣고 빼기 모두 성공한 것이다!

한 번 성공하고나니 이제 넣는 것도, 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지나한테 나 생리컵 넣고 빼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우쭐대기도했다. 이렇게 섣불리 깝치면 꼭 일이 터지던데 역시나 셋째날 갑자기 생리가 샜다.

아무래도 실링이 잘못된 것 같았다. 이게 질 안쪽에서 뾱 하고 펴지는 느낌이 나질 않으니 도통 제대로 장착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넣어보면 뭔가 팽팽한 것이 제대로 펴진 것도 같고.. 근데 피는 자꾸만 새고.. 팬티라이너를 대고 나와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초조했다. 실링이 제대로 된 걸 어떻게 확인하는거지? 누가 내 질 좀 들여다봐줬으면했다.

각종 SNS에서 생리컵 후기를 5조 5억개 찾아보니 이게 안으로 밀어 넣더라도 그 방향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내 경우에는 첫째, 둘째 날처럼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넣어야 했는데 셋째 날엔 좌측 상단으로 넣어서 문제였던 것 같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얻어걸린 것 같기도하고.)

실링 문제를 해결한 후엔 피가 새지 않았고, 생리도 무사히 마쳤다. 월경과다증상이 있어 L사이즈 생리컵이 거의 다 찰 정도로 양이 많은 날도 하루 있었지만, 그 날을 제외하고는 보통 생리컵의 1/3 정도가 찼다 (8시간 착용 기준). 어떤 날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갈아주는 걸 잊고 10시간까지 착용하기도 했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불안함에 팬티라이너를 계속 착용했지만, 실링이 잘못된 날을 빼고는 피가 묻어나온 적도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눕든 샐 걱정 없으니 생리양이 많아 똥꼬에 휴지를 끼고 자던 지난 세월이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생리컵을 착용하는 기간 동안 생리통도 전보다 줄었고, 무엇보다 생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하나도 없어 놀라웠다. 생리하는걸 잊을 정도로 이물감도, 묵직한 느낌도 없는 이 경이로움…. 특히 덩어리 나올 때 느껴지던 그 불결함이 없어 너무너무 좋았다.

이물질을 내 손으로 직접 질에 넣기란 쉽지 않다. 한국엔 세면대와 변기가 붙어있는 화장실도 잘 없고,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질에 무언가를 삽입한다는 것에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한심한 사람들도 많은데다가 이런 여론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스스로 거부감을 느껴 결심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생리 자체를 안 할 수 있다면 사실 제일 좋겠지만 그게 거의 불가능하니 우리는 생리기간을 최대한 편히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중엔 좋은 생리대를 찾아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건강에 좋은지 확신할수도 없고 불편함까지 감수 해야 한다. 생리컵에 약간의 두려움과 망설임 정도만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 시도해보길 권하고 싶다. 1회의 비용으로 연속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점만으로도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 생리컵 삽입을 도전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제한당해왔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성공의 경험은 소중하다. 매몰되어온 도전에의 의지를 작게나마 싹 틔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건강과 편리함이 따라오는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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