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처음엔 페미니즘 공부를 강제로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출발한 모임이었다. 운영을 하다 보니 지역 단위의 페미니즘 네트워크 형성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서로 이어져있다’는 경험을 나눠가지는 일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모임은 내가 생활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운동이었다('운동'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이 아까워 웹진 운영도 기획해 어렵사리 터를 잡았고, 모임을 구체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한 목표 설정도 어느정도 마친 상태였다. 모임 운영이라고 해봐야 사실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시간 약속을 잡고 장소를 정하고 연락을 돌리는 등의 단순 업무였다. 웹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귀찮았고, 때때로 욕설이 가득한 모임참여신청서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일들을 기분 좋게 이어갔다. 내가 모임을 이끄는 일에 자긍심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모임구성원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유대감과 소속감은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 난 이 모임이 있어 나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이 모임이 나를 살린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만두고 싶다. 신념 때문에, 입장과 태도 때문에, 책임감 때문에 사람에게 실망하고 지친다. 사람 때문에 다친 마음이 신념으로 치유 되진 않는다.

나는 고작 이 정도인 사람이다. 처음부터 모임을 이끌만한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이 모임을 시작하고 네가 사회에 기여한 게 도대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난 뭐라고 대답할 수 있지? 꼭 무언가를 기여해야하나? 내가 페미니스트 선언 이후 하는 모든 정치적 행위가 운동으로서 의미를 구축해야하나? 내 모임의 방향 설정이 처음부터 잘못된건가? 나는 이걸 다시 고쳐나갈 수 있나? 난 외로워서 이 모임을 시작했나? 우리 모임의 의미는 무엇일까? 실은 내 하찮은 인정 욕구 때문에 시작했었나? 아니면 모임을 통해 페미판에서 쓸모 있는 존재라고 자위하기 위해? 이 모임은 어떤 쓸모가 있지? 내가 지금 이러는건 사람들이 내 일을 알아봐주지 않아서인가? 난 그냥 억울한 것 뿐일까? 누구든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왜 내게서는 자격이 없음을 굳이 찾아내어 그 지위를 박탈하려하는걸까? 왜 나는 나를 싫어할까.


몸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이 서늘한 응달을 벗어나고 싶다. 나는 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