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밤에


    20대 중반에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아주 힘든 시기는 지나왔지만 지금도 때때로 죽고 싶을만큼 울적하다. 내게는 사랑하는 가족도, 이제 막 꾸미기 시작한 귀여운 집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좋은 동료들도 있지만 이들이 주는 정서적 지지감을 느끼고 기대기에는 힘든 순간이 너무 지독하게 힘들다. 지독하게 힘들어서 그들이 내 곁에 있는걸 떠올리거나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없다.

    하지만 괴로운 날에도 나는 나아지고 싶었다. 괴로움의 원인들을 지금 당장 소거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직면해야 할 상황에서 회피만 반복하고 있는건 아닌지,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에 괜한 불안을 느끼는 것인지 체크하며 리스트의 항목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도,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는 일도,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 일도 전부 괜찮은 내가 되고 싶어서 억지로 해낸 일들이었다. 어떤 날은 몸을 일으키기조차 힘들어서 울면서 누워있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거실까지 나오는 데에 성공했지만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벽만 쳐다보기도 했다. 우울은 다음 스텝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음을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우울은 관성이 강한 감정이다. 한 번 크게 짓눌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회복이 어려운데 몸집을 불리려고까지 한다. 이런 우울의 요구에 저항없이 응하면 안된다. 
    힘들면 힘든 상황을 보지 못하고 힘든 ‘나’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의 힘듦 그 자체가 중요해지면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밀려난다. 이 때 상황을 멀리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울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나는 우울할 때 내가 미리 적어둔 ‘의지문’을 찾아 읽는다. 의지문의 첫 문장은 이렇다. ‘우울한 나를 보지말고 우울함을 초래한 상황을 보자’
     최근에 마음이 좀 힘들었다. 웃는 일은 손에 꼽았고, 할 일이 많은데도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있기 일쑤였다. 그래도 또 괜찮아졌다. 죽을 힘을 다해 일어나고, 씻고, 움직이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우울을 잘 내보이지 않아서 아마 타인의 눈엔 늘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거다. 그것보단 나 스스로에게 더 나은 사람이고 싶다. 올해도 몇 번의 고비가 찾아올테고 나는 또 죽고 싶을만큼 힘들겠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기억할 것이다. 조금씩 나아졌던 나를, 내가 흘려보낸 과거의 내가 보내는 당찬 기운들을. 
    또 다시 우울함이 찾아오면 익숙하게 받아들이되 오래 함께하진 말자고 다짐하며
 20년 2월 13일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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