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30





모든 글쓰기가 그렇겠지만.. 서평 쓰는게 젤 어려운 것 같다.. 요새는 글 잘쓰고 싶어서 글쓰기 책만 본다. 글쓰기의 최전선이랑 서평 쓰는 법 같은 책들.

[클럽 창작과비평] 은희경 작품 리뷰하기

은희경 소설가의 작품 중 좋았던 것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 쓰기

은희경은 백수린과의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페미니즘 리부트가 문학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답을 하면서 본인의 작품인 '빈처'를 언급한다. (작가가 인권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예의를 소설 쓰는 기본 태도로 지니고 있다면, 소재나 이야기 쓰는 방식에서는 페미니즘이 소설쓰기의 제약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90년대에 제가 쓴 빈처(타인에게 말걸이, 문학동네 1996)라는 작품은 지금 눈으로 보면 어이없는 상황이 그려진 소설이에요. (중략) 당시의 맥락에서는 세태소설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한 작은 도서관에서 이 소설을 낭독했어요. 너무 옛날 소설이라서 읽을까 말까 하다가 읽었는데 그때 여성 독자들이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는거예요. 이게 10년 후에도 유효하다니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 난감하더라고요. 그런데 최근 이 소설을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성독자들이 또 공감하더라고요. 이런 현실이 너무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빈처는 내 기억 속에 두 번 읽고 싶진 않은 소설로, 하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그래서 결국 다시 읽게 되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불쾌하리만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 마치 이 시대 남편들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대사들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기 생각을 갖고 산걸까. 그녀는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데 소질이 있는 편이었다'.'그렇다고한들 어디를 보나 살림하는 아줌마일 뿐인 그녀에게 무슨 기회가 오겠으며 그럴 능력이나 있겠는가' 같은 남편의 생각이나 '불현듯 그녀가 안쓰럽고 소중한 것이 가슴에 품고 싶어진다. 그녀의 잠옷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녀가 눈을 뜬다. 그대로 나는 그녀의 속으로 들어갔다' 같은 행동들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어이없는 상황이 그려진 소설'이라고 설명했지만, 여성독자들이 이 책에 깊이 공감을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본질은 실제로 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남성들의 생각을 집요하게 읽어낸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나'(남편)는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 강한 자의식에 갇혀 사는 인물이다. 이는 내가 아내와 친구,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해 갖는 생각들로부터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나'는 겉옷을 스스로 걸지 않고 아내에게 건네주며 아내의 설거지를 한 번 도와주지 않지만 어쩌다 한 번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로 가정적인 남편이다. '나'는 아내의 불운한 처지에 대해 알고 나서 안아주고 싶다는 이유로 지쳐 쓰러진 아내를 굳이 깨워 잠자리를 가진다. '나'는 학창시절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던 친구들이 어느새 자기보다 한참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배아파한다. 그리고 이런 속도 모르는 아내가 밉다. '나'는 아내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자신은 매일 술을 마시지만) 아내가 한두번 술을 마신 것 같자 화가 난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자 신랄하게 대꾸하는,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아내가 낯설다.

이 소설은 온통 이런 '나'의 이야기다. 아내의 이야기는 일기장을 통해 소극적으로 전달될 뿐이다. 이 소설의 본질은 '아내의 일기장'이라는 소재에 기인하여 세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남편의 생각'이다. 한국 남성의 보편적인 생각에 기인한 대사와 행동들은 결혼이 여성의 인생에 어떤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그 종말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 따위 술기운이 내 꼴을 내가 보는 자괴감을 마비시켜줄 리는 없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나는 어떤 집인지 모를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까닭없이 그 불빛에 대고 그리움을 느꼈다.'는 일기장의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고작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 이루어진 사랑에 대한 한탄은 그녀의 외로운 처지를 보여주는 한편 '사랑'이라는 부실한 토대에 기반한 결혼이 허무함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빈처의 마지막 문장(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 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은 '나'에게 느끼는 독자의 불쾌함을 최고조에 달하게 만든다. 그녀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녀의 일기장을 덮고 짐짓 진지한 척 자신의 빈약한 인생론을 늘어놓는다. 벨소리도 듣지 못하는 아내가 깨어나 아파서 보채는 자식을 급히 챙기는 모습을 돕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진지하고 엄숙한 삶의 한 장면인 것처럼 마무리하는 모습은 아내가 일기장에 적어 놓은 '똥' 같다. 결혼하면서 곁에 두게 된, 엄연한 바로 그 똥 말이다.

19.12.29











이 사진.. 방에 걸어두고 싶다























내가 알고 지내는 동생들은 모두 제 할 일도 잘하고 강하다. 요즘은 그런 동생들에게서 많이 배운다. 

19.12.28



내년에는 들불도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을 했음 좋겠다. 뭐가 있을까..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기획력이나 에너지가 올해보단 많았으면 해..

19.12.27





















오랜만에 아웃백에 갔다.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너무 밝고 활기차서 싫었다(?)... 예전 아웃백은 말소리도 웅성웅성 들리고 사람들 얼굴도 잘 안 보여서 참 좋았는데.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랑 함께여서 즐거웠다. 각자의 생일마다 아웃백에 가기로 했고, 1월에는 고도에 가고 사진도 또 찍기로 했다. 누군가와 다음을 정하는 건 참 좋은 일이다. 

19.12.26



삶을 익숙한 것과 낯선 것으로 채운다면 황금분할은 어떤 것일까. / 그녀의 세번째 남자, 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를 다시 읽고 있다. 은희경 작가님의 적당히 차갑고 단정적인 문장들 너무 좋다. 가령 이런 문장. '그녀는 세상을 그다지 기운차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 방식에 큰 불편은 없어 보였다.' 

19.12.25











고양이에 대한 글을 썼는데 생각보다 별로라 엎었다.

19.12.24













오랜만에 몰림. 5등 했는데도 기분 좋았던거 살면서 처음이었다.

고독을 괴어놓는 일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예비할 수 있다고. (...)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 작가의 말, 김금희

    나는 거의 평생을 관계에 뒷덜미 잡힌 채로 살았다. 환상, 연민, 의존, 낭만 같은 허상에 사로잡힌 채 자발적으로 뒷목을 내어주기도 했다. 억지로 붙잡힌 뒷덜미는 벌겋게 부어오르기 마련이었고, 나는 아픔의 까닭을 오직 내게서만 찾았다. 이를테면 엄마와의 관계가 그랬다. 30년 가까이 나는 엄마의 요구를 나의 욕망 앞에 두었다. 엄마가 시키는 건 군말없이 다 했다. 나의 성공은 엄마 덕에 이룬 성취였고, 실패는 그저 내가 못난 탓이었다. 성공도 실패도 다 내 것인데도 그랬다.

    처음 엄마에게 반발심이 생겼던 날,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의 뒷통수에 대고 말했다. '왜 엄마는 내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일엔 무관심하고, 그냥 나를 믿고 맡겨주었으면 하는 일에는 집요하게 간섭해? 나는 왜 맨날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해야 돼?'
수세미가 그릇에 닿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울렸고 고무장갑의 마찰음이 기분 나쁘게 섞였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때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걸 바로 마주한 적이 없었구나.

영희는 문제가 없는 아이였기에 어릴 때부터 깨닫는다. 자신이 일생동안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부모가 불가능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 그녀의 부모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제 욕망을 위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그 불가능한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일생을 슬퍼한다. 그녀는 오늘따라 이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 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내가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내 욕망보다 상대의 요구를 우선시했다. 일단 내 욕망이 뭔지도 몰랐다. 지워진(어쩌면 만들어진 적도 없는) 내 욕망을 새로 그리는 일은 많은 실패를 전제했다. 욕망의 진공상태는 실패의 경험들로 공허하게 채워졌다. 간신히 내가 원하는 걸 찾았다고 생각하면 실은 가까이의 누군가가 그것을 좇았기 때문에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낙담하기도, 내가 원한다고 착각해서 벌인 일에 여럿이 상처를 입기도 했다. 처음엔 김이 새고 말았지만 실패를 거듭할수록 두려웠다. 엄마가 빚어놓은대로 살게 될까봐 무서웠다.

    이 즈음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세상 주변부로 밀려났다. 창 밖을 내다보거나 산책을 하고 책을 읽는 것이 전부인 나날이 이어졌다. 이 때 내게 얽혀있던 많은 것이 끊어졌다. 아득히 멀었던 관계들은 금세 희미해졌고, 지독히 가까웠던 관계들은 본래의 균형을 찾았다. 나는 관계의 도식을 새로 그리면서 자연스레 관계성의 과잉 상태에서 벗어났다. 비로소 나는 나의 정체성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독'이 빚어낸 결과였다.

"멀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깝다는 느낌도 없었다. 충분하다는 느낌이었다." / 후5, 최진영

    고독한 상태에서는 내가 나를 적당한 풍경 쯤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 고독은 나와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한걸음 떨어져 관망할 수 있게 한다. 처음 고독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인사만 나누는 지인과 목욕탕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숨 막히게 부끄럽고 괴롭다. 내가 그리 대단치도, 멋지지도 않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니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시간은 나를 객관화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나를 더 긍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극단의 외로움은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한다. 온기가 표백된 장소에서 관심을 구걸하게 만들고, 형편없는 관계에 매달리게 한다. 반면 고독은 모난 궤적으로 남은 관계의 실패들을 톺아보고 벗어나게 만든다. 궤적을 파헤치면서 타인에 의해 억눌렸던 내 욕망을 발견하게 되고 나를 더 알게 된다.

    고독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조율하면 그제야 내 곁에 넉넉히 머문다.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 규칙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것은 적어도 한달에 2주 정도는 나와 타인 사이에 선선한 바람이 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관계 안에서 해소하고 실현했던 나를 숨쉬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이제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해져도 흔들림없이 서 있는 나무처럼 혼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가끔 찬바람에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관계의 불평등을 그대로 수용하고 상대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면서까지 그 상태를 벗어나려 애쓰고 싶지 않다. 허위적 환상에 기반한 관계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기보다 고독에 침잠하며 잎을 틔울 날을 기다리는 일이 이젠 더 좋다. 온갖 것들과의 분리를 경험하며, 나는 성숙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삶 한 구석에 고독을 괴어놓으니 그렇다.

19.12.23

허수경 수수께끼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아.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 있어?

이별만 있었지

나는 그 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우순이 잊어버린 눈물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 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 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고 있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 라고 우리는 만년 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회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이 시 처음 알았을 때 줄줄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하네. 나한테 이별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그런가봐 너무 많은 것들과 헤어져와서 이제는 별 일 아니거나

19.12.22











원더님이 기획하신 기록과  워크샵에 다녀왔다기록광인이라 기록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어렵지 않았지만.. 수줍어서 말을 고르게    같아 아쉽다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편안했다빨갛게 돌출된 여드름이나 해감   조갯살에씹히는 모래처럼 느껴지지 않고 말이다편안한 워크샵을 기획해주신 원더님과 계속해서   있다고 이야기해주신 루씨님에게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보내며.. 2020년에도  살아봅시다 !!

[클럽 창작과비평] 소설 리뷰하기

단편 '연수' 리뷰(장류진 작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뜻하지 않은 계기로 맞닥뜨리게 되는 '연결'의 장면들이 있다. 장류진 작가의 단편소설 '연수'는 그러한 연결의 장면들을 다소 투박하게 포착해낸다. 

    '나'(주연)는 신규 프로젝트를 핑계로 차량을 구매하고 운전을 다시 시도해보려한다. 주연에게는 과거의 운전 경험 실패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주연은 운전 연수를 받아보려한다. 맘카페에 가입하고 정회원 승급 절차를 기다리는 동안 주연은 주연의 결혼을 둘러싼 '진짜 주연맘'과의 갈등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승급 후 카페를 둘러보던 중 '사고팔고' 올라온 중고 팬티 거래를 보며 아연하여 비혼에 대한 결심을 더욱 더 굳히게 된다. 한편, 카페에서 받은 번호로 연락을 한 주연은 묘하게 프로다운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 다소 이해가 안되는 항목이 포함된 서식을 채워보내고 연수를 받기로 한다. 몇 가지 찜찜한 구석이 있기는 하나 주연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는다. 

    아주머니와 함께 운전 연수를 받게 된 주연은 본인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교육 과정과 결혼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무례함에 기분이 언짢아진다. 황당한 기분으로 첫 날의 연수를 마친 주연은 과거의 경험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주연은 운전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이것저것 검색해보게 되고, 누군가 주연에게 '운전 같은거'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 날 어김없이 연수를 받으러 간 주연은 편의점에서 아주머니와 아침식사를 하면서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처음 보냈던 서식 속 이해 못할 혈액형 항목의 존재 이유를 통해, 그리고 본인 또래의 여성도 회사를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그녀의 질문을 통해. 그리고 주연은 문득 아주머니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인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 당신의 인생에서 기쁜 일을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딸에게서 찾던 그 모습들을. 

    오솔길을 달려보자는 강사의 제안에 낯선 길에 접어든 주연은 커다란 호수의 풍경을 보게 되고, 그 풍경 속에서 운전을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오솔길 코스를 마친 후 주연은 강사에게 연수 시간을 추가할 것을 제안하지만, 곧장 거절당한다. 그리고 이내 원격 수업을 진행한다. 스피커폰으로 조언을 해주겠다는 강사의 제안에 주연은 난감해하며 운전을 시작한다. 긴장한 상태로 운전을 하던 주연은 길을 잘못 들게 되는데, 이 때 강사가 뒤에서 주연을 막아주며 주연이 받아야 할 경적을 대신 받는다. 그리고 잘하고 있다는 강사의 격려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에서는 짤막하지만 분명하게, 강하게 얽혀있는 '연결'의 고리들을 보여준다. 도입부에서는 그 연결 고리의 녹슨 부분을 먼저 조명하는데, 엄마와의 결혼을 둘러싼 갈등, 맘카페의 중고 팬티 거래에 대한 당혹스러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고 무례한 연수 강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주연을 통해서만 기쁨을 알고 느끼던 엄마의 모습과 일면식 없는 맘카페 회원인 준서맘의 소개로 원하는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된 연수, 왠지 모르게 엄마를 떠올리게 만드는 연수 강사의 질문들과 혈액형을 믿는 시덥잖은 이유들을 통해 작가는 연결의 고리가 녹슬었을지언정 끊어지진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오솔길 코스를 주행하는 주연의 태도에서 주연도 우리처럼 연결의 장면들을 포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연이 느낀 편안함과 안정감은 단순히 그 풍경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주연도, 우리도 안다. 이윽고 갑작스럽게 공간(주연의 차)과 공간(강사의 차)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 주연에게 강사가 스피커폰으로 조언을 하고, 뒤에서 대신 경적을 받는 장면에서 작가는 공간(세대, 상황)이 분리되어 있어도 주연과 강사는(여성과 여성은) 연결되어 있음을 다소 투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2030세대의 여성들은 5060세대의 고충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틀린 것으로 치부하고, 서로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미워하며 각자의 세대로만 남는다. 섞이려는 시도는 갈등의 날카로운 칼날에 무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처지가 다르더라도,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서로가 서로를 필연적으로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희미하고 미약한 지지의 힘을 선명하게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뿐이라는 걸, 결국 서로를 돕는 건 서로뿐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장면을 여성들이 많이 목격하고 경험했으면 좋겠다. 비록 서로를 돕는 방식이 외부의 경적을 대신 받아내는 일 뿐일지라도 말이다.

19.12.21















아침부터 케이크 먹으려고 부지런 떤 날. 낙성대 쪽에 월간상회라는 곳 갔고 만족스러웠다.. 사장님도 정말 좋은 분이었고 무엇보다 적당히 단 맛과 적당히 부드러운 식감.. 최고였다. 지나랑 수다 떨면서 여러가지 느꼈는데 그 중 제일은 보고 자란 경험이 내 욕망의 일부를(어쩌면 전부일지도?) 이루고 있단 사실.. 깨닫고나니 새삼 좀 징그러웠다. 인간은 평생을 너무 좁은 테두리에 갇혀 사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다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