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창작과비평] 은희경 작품 리뷰하기

은희경 소설가의 작품 중 좋았던 것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 쓰기

은희경은 백수린과의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페미니즘 리부트가 문학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답을 하면서 본인의 작품인 '빈처'를 언급한다. (작가가 인권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예의를 소설 쓰는 기본 태도로 지니고 있다면, 소재나 이야기 쓰는 방식에서는 페미니즘이 소설쓰기의 제약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90년대에 제가 쓴 빈처(타인에게 말걸이, 문학동네 1996)라는 작품은 지금 눈으로 보면 어이없는 상황이 그려진 소설이에요. (중략) 당시의 맥락에서는 세태소설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한 작은 도서관에서 이 소설을 낭독했어요. 너무 옛날 소설이라서 읽을까 말까 하다가 읽었는데 그때 여성 독자들이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는거예요. 이게 10년 후에도 유효하다니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 난감하더라고요. 그런데 최근 이 소설을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성독자들이 또 공감하더라고요. 이런 현실이 너무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빈처는 내 기억 속에 두 번 읽고 싶진 않은 소설로, 하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그래서 결국 다시 읽게 되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불쾌하리만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 마치 이 시대 남편들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대사들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기 생각을 갖고 산걸까. 그녀는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데 소질이 있는 편이었다'.'그렇다고한들 어디를 보나 살림하는 아줌마일 뿐인 그녀에게 무슨 기회가 오겠으며 그럴 능력이나 있겠는가' 같은 남편의 생각이나 '불현듯 그녀가 안쓰럽고 소중한 것이 가슴에 품고 싶어진다. 그녀의 잠옷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녀가 눈을 뜬다. 그대로 나는 그녀의 속으로 들어갔다' 같은 행동들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어이없는 상황이 그려진 소설'이라고 설명했지만, 여성독자들이 이 책에 깊이 공감을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본질은 실제로 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남성들의 생각을 집요하게 읽어낸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나'(남편)는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 강한 자의식에 갇혀 사는 인물이다. 이는 내가 아내와 친구,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해 갖는 생각들로부터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나'는 겉옷을 스스로 걸지 않고 아내에게 건네주며 아내의 설거지를 한 번 도와주지 않지만 어쩌다 한 번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로 가정적인 남편이다. '나'는 아내의 불운한 처지에 대해 알고 나서 안아주고 싶다는 이유로 지쳐 쓰러진 아내를 굳이 깨워 잠자리를 가진다. '나'는 학창시절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던 친구들이 어느새 자기보다 한참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배아파한다. 그리고 이런 속도 모르는 아내가 밉다. '나'는 아내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자신은 매일 술을 마시지만) 아내가 한두번 술을 마신 것 같자 화가 난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자 신랄하게 대꾸하는,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아내가 낯설다.

이 소설은 온통 이런 '나'의 이야기다. 아내의 이야기는 일기장을 통해 소극적으로 전달될 뿐이다. 이 소설의 본질은 '아내의 일기장'이라는 소재에 기인하여 세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남편의 생각'이다. 한국 남성의 보편적인 생각에 기인한 대사와 행동들은 결혼이 여성의 인생에 어떤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그 종말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 따위 술기운이 내 꼴을 내가 보는 자괴감을 마비시켜줄 리는 없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나는 어떤 집인지 모를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까닭없이 그 불빛에 대고 그리움을 느꼈다.'는 일기장의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고작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 이루어진 사랑에 대한 한탄은 그녀의 외로운 처지를 보여주는 한편 '사랑'이라는 부실한 토대에 기반한 결혼이 허무함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빈처의 마지막 문장(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 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은 '나'에게 느끼는 독자의 불쾌함을 최고조에 달하게 만든다. 그녀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녀의 일기장을 덮고 짐짓 진지한 척 자신의 빈약한 인생론을 늘어놓는다. 벨소리도 듣지 못하는 아내가 깨어나 아파서 보채는 자식을 급히 챙기는 모습을 돕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진지하고 엄숙한 삶의 한 장면인 것처럼 마무리하는 모습은 아내가 일기장에 적어 놓은 '똥' 같다. 결혼하면서 곁에 두게 된, 엄연한 바로 그 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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