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매일 아침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전장에 나가는 병사와 같은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고 뺨을 후려갈기는 과학 선생과 걸핏하면 담배를 숨겨달라던 짝꿍의 부탁, 메신저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나러 강화도에 가겠다는 단짝 친구, 못생긴 자줏빛 교복, 물 비린내 나는 복도, 학교에 넘실대던 해맑은 악의들.. 그 모든 것에 나는 지쳐있었다. 나는 이 모든 소품들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늘 배경과 동화되어 존재 자체가 희미한 엑스트라였다. 나는 부러지기 쉬운 마른가지였고, 마른가지는 겨우 땔감이 될 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분수를 깨닫는 순간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하나의 거대하고 비극적인 사건.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죽음이었다. 땔감은 불 타 사라지면 그만이란걸 깨닫지 못한 여중생의 끔찍하고 무모하며 무가치한 상상들 속에서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싫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금 나아졌다.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야자를 튀었고, 교복을 줄여 입었다. 특별해진 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했고 나도 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남들이 줄이는 만큼만 교복을 줄였고, 남들이 하는 만큼만 선생에게 대들었다.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들처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빈도도 급격히 줄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내가 겪은 가장 가까운 죽음이었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죽음은 열 다섯의 내가 상상하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시골집 마당에서 울려퍼지던 곡소리,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 영문도 모른 채 우물거리던 소들, 말라가던 여물들, 살아생전의 외할머니를 추억하는 입들. 그 풍경을 바싹 마른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죽음은 그것의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사건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그 죽음을 목격한 이들을, 죽은 이의 사연을, 추억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대답 없는 텅 빈 공간으로 남을 뿐이었다.

  대학생이 되고는 한동안 죽음을 잊고 살았다. 대체로 즐거웠고, 아주 가끔 우울했다. 그러다 졸업할 때쯤 애정을 쏟던 동아리에서 퇴출 당했다. 그까짓 동아리쯤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크게 상처받았고 또 다시 죽음을 떠올렸다. 살고 싶지 않았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매일을 버텼다. 텅 비어버린 내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떠올렸다. 동아리 친구들을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원망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는 일이란 걸 그 땐 몰랐다. 어리석었지만 그 땐 그랬다. 죽는 법도 사는 법도 모르던 시기였다. 

  어느새 30대가 되었다. 30대의 삶은 벽에 부딪히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로봇청소기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너도나도 까치발을 한 채 외줄을 탔고, 나는 내가 불을 피울 수 있는 땔감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나라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불행들에 꽤 익숙해졌고, 슬픔이 거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영원히 마모될 일만 남은 모서리가 되는 일인걸까하고 자주 생각했고, 닳아버린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다시 죽음을 떠올렸다.

  이렇게 나는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어쩌면 전보다 더 자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 같이 살아보자고. 죽음을 자주 떠올릴지언정 사는 것을 포기하진 말자고. 잘 익은 홍시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의지하면서, 한겨울 희미하게 부서지는 입김처럼 금방 사라져버리는 가벼운 행복에라도 기대면서 그렇게 살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별사탕이 몇 개 안 들어있단 걸 알면서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뽀빠이를 사는 것처럼, 한줌의 행복이라도 손에 꽉 쥐고 버티면서 그렇게 살아주었으면 한다. 그게 안되면 나의 이런 무책임한 제안에 '그럴까?' 하며 못 이기는 척 살아주었으면 한다. 알알이 박힌 우리의 불행들을 빼내려다 손톱이 다 뽑혀도 나는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을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가까이에 내가 있다고, 이런 나도 살았으니 그런 당신도 살라고 소리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대해 길게 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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