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괴어놓는 일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예비할 수 있다고. (...)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 작가의 말, 김금희

    나는 거의 평생을 관계에 뒷덜미 잡힌 채로 살았다. 환상, 연민, 의존, 낭만 같은 허상에 사로잡힌 채 자발적으로 뒷목을 내어주기도 했다. 억지로 붙잡힌 뒷덜미는 벌겋게 부어오르기 마련이었고, 나는 아픔의 까닭을 오직 내게서만 찾았다. 이를테면 엄마와의 관계가 그랬다. 30년 가까이 나는 엄마의 요구를 나의 욕망 앞에 두었다. 엄마가 시키는 건 군말없이 다 했다. 나의 성공은 엄마 덕에 이룬 성취였고, 실패는 그저 내가 못난 탓이었다. 성공도 실패도 다 내 것인데도 그랬다.

    처음 엄마에게 반발심이 생겼던 날,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의 뒷통수에 대고 말했다. '왜 엄마는 내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일엔 무관심하고, 그냥 나를 믿고 맡겨주었으면 하는 일에는 집요하게 간섭해? 나는 왜 맨날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해야 돼?'
수세미가 그릇에 닿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울렸고 고무장갑의 마찰음이 기분 나쁘게 섞였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때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걸 바로 마주한 적이 없었구나.

영희는 문제가 없는 아이였기에 어릴 때부터 깨닫는다. 자신이 일생동안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부모가 불가능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 그녀의 부모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제 욕망을 위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그 불가능한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일생을 슬퍼한다. 그녀는 오늘따라 이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 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내가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내 욕망보다 상대의 요구를 우선시했다. 일단 내 욕망이 뭔지도 몰랐다. 지워진(어쩌면 만들어진 적도 없는) 내 욕망을 새로 그리는 일은 많은 실패를 전제했다. 욕망의 진공상태는 실패의 경험들로 공허하게 채워졌다. 간신히 내가 원하는 걸 찾았다고 생각하면 실은 가까이의 누군가가 그것을 좇았기 때문에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낙담하기도, 내가 원한다고 착각해서 벌인 일에 여럿이 상처를 입기도 했다. 처음엔 김이 새고 말았지만 실패를 거듭할수록 두려웠다. 엄마가 빚어놓은대로 살게 될까봐 무서웠다.

    이 즈음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세상 주변부로 밀려났다. 창 밖을 내다보거나 산책을 하고 책을 읽는 것이 전부인 나날이 이어졌다. 이 때 내게 얽혀있던 많은 것이 끊어졌다. 아득히 멀었던 관계들은 금세 희미해졌고, 지독히 가까웠던 관계들은 본래의 균형을 찾았다. 나는 관계의 도식을 새로 그리면서 자연스레 관계성의 과잉 상태에서 벗어났다. 비로소 나는 나의 정체성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독'이 빚어낸 결과였다.

"멀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깝다는 느낌도 없었다. 충분하다는 느낌이었다." / 후5, 최진영

    고독한 상태에서는 내가 나를 적당한 풍경 쯤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 고독은 나와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한걸음 떨어져 관망할 수 있게 한다. 처음 고독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인사만 나누는 지인과 목욕탕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숨 막히게 부끄럽고 괴롭다. 내가 그리 대단치도, 멋지지도 않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니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시간은 나를 객관화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나를 더 긍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극단의 외로움은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한다. 온기가 표백된 장소에서 관심을 구걸하게 만들고, 형편없는 관계에 매달리게 한다. 반면 고독은 모난 궤적으로 남은 관계의 실패들을 톺아보고 벗어나게 만든다. 궤적을 파헤치면서 타인에 의해 억눌렸던 내 욕망을 발견하게 되고 나를 더 알게 된다.

    고독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조율하면 그제야 내 곁에 넉넉히 머문다.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 규칙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것은 적어도 한달에 2주 정도는 나와 타인 사이에 선선한 바람이 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관계 안에서 해소하고 실현했던 나를 숨쉬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이제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해져도 흔들림없이 서 있는 나무처럼 혼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가끔 찬바람에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관계의 불평등을 그대로 수용하고 상대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면서까지 그 상태를 벗어나려 애쓰고 싶지 않다. 허위적 환상에 기반한 관계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기보다 고독에 침잠하며 잎을 틔울 날을 기다리는 일이 이젠 더 좋다. 온갖 것들과의 분리를 경험하며, 나는 성숙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삶 한 구석에 고독을 괴어놓으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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