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나



    튼튼이는 아름다운 삼색의 고양이다. 잘 익은 벼 같은 노란 털과 모자이크처럼 불균일하게 번져있는 까만 털, 그리고 별자리처럼 박혀있는 흰털까지 그 빛깔이 퍽 우아하다. 또 흰 양말을 신은 발과 까만 잉크를 밟은듯한 발바닥은 어찌나 귀여운지 모른다. 튼튼이와 달리, 꼬맹이는 욕심껏 튀어나온 주둥이에 탐스러운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다. 코에는 숯 조각 같은 검댕이가 묻어있고, 발에는 자그마한 까만 점이 귀여움을 부각시키려는듯 강조점처럼 콩콩 새겨져있다.

    고양이들은 때때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깨우쳐준다. 깨달음을 주는 방법은 다양하다. 내가 테이블에 올려둔 유리컵을 발 끝으로 살살 밀어 깨뜨리고 내가 미처 숨겨두지 못한 두루마리 휴지를 길게 풀고 뜯어놓으면서 나의 부주의함을 반성하게하거나 쓰지 않고 내버려뒀던 수첩 끝을 잘근잘근 씹어 나의 소비습관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제 때 치우지 않은 종이상자를 사정없이 물어뜯어서 나의 게으름을 지적하는 식이다.

    고양이들은 인내심도 좋다. 특히 꼬맹이는 개수대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쳐다보고 있는걸 즐기는데, 수도꼭지를 너무 꽉 잠궈놔서 물이 떨어지지 않을 때는 몇 분이고 가만히 앉아 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림 끝에 물이 한두방울 떨어지면, 몸이 젖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다 맞으며 기다림이 결실을 맺는 그 순간을 크게 즐기기도 한다.

    **ㅝ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2**(꼬맹이가 작성한 문장입니다) 아이들의 상냥한 존재감은 인간의 정서를 쉽게 장악한다. 인간은 고양이 앞에서 무력하다. 인간이 그들 앞에서 힘을 발휘해야 하는 유일한 순간은 그들을 먹이기 위한 캔을 딸 때 뿐이다. 또, 그들은 인간을 쉽게 무릎꿇게 만든다. 그들은 박치기를 하며 인간에게 만짐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별 수 없이 받아들인다. 튼튼이는 골골송을 부르며 이리저리 움직이며 만짐 당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릎을 찧으며 그의 뜻에 맞춰 상하좌우로 이동한다. 

    나는 가끔 이 아이들이 길에서 떠도는 모습을 상상한다. 숲도 풀도 나무도 꽃도 나비도 벌레도 없는 삭막한 동네에서 아이들은 조각난 소주병이나 굴러다니는 닭뼈를 가지고 넘치는 에너지를 해소했겠지. ㅇㅇㅇㄴㄴㄴㄴㄴㄴㄴㄴㅣㅣ433ㅣㅣㅣㅣㅣㅣㅣㅣㅣ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ㅇㅇㅇㅇㅇㅉㅉㅉㅉ4444442(꼬맹이가 작성한 ㅡㅡㅡㅡㅜㅜㅕㅕㅗㅓㅏ문장입니다) 그리고 이 상상의 끝엔 언제나 내가 데리고 오지 못한 다른 고양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얼굴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그들을 보살피지 못한데에서 연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서 느끼는 책임감에 대한 인식에서 파생된 죄의식이다. 

    나는 튼튼이와 꼬맹이의 얼굴을 자주 들여다본다. 내 옆의 아이들을, 그리고 다른 곳에 있을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ㅡ,ㅏ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ㅑㅐㅣㅔㅔㅔㅔㅔㅔㅔㅔㅔㅏ호ㅛ (꼬맹이가 작성한 문장입니다) 아이들을 이 작은 공간에 두는 것이 사랑이 맞는걸까 때때로 고민하고 아이들의 조금 달라진 입맛과 행동에 조바심을 느낄 때도 많지만 나는 그렇게 계속 궁금해하고 괴로워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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