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1)


    처음 '차별'이라는 개념을 희미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건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이었다. 당시 우리반엔 운동 신경이 굉장히 좋은 친구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그 친구에게 체육 시간마다 시범을 보여달라는 제안을 하자 친구가 '운동을 하는 여자는 예뻐보이지 않는다'며 거절한 일이 있었다. 나는 친구의 행동이 왠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엄마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엄마는 '여자가 운동을 잘해서 무슨 쓸모가 있냐'고 대꾸했다. 엄마는 그 친구가 똑부러진다는 칭찬까지 덧붙였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전에 엄마가 출발드림팀에서 뜀틀을 뛰던 조성모를 보며 남자라면 잘하는 운동 한두개쯤은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까짓 뜀틀 잘 뛰어서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차별의 경험들이 겪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차별의 첫 장면은 이랬다.

    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건 고2때였다. 점심 시간마다 매점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딘가에서 종이비행기가 날아왔다. 그 날 나는 매점에서 산 빵또아를 먹으며 배드민턴 시합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혹여나 연애편지는 아닐까 수근대며 종이비행기를 펼쳤다. 펼친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니 가슴 존나 덜렁거린다'

    친구들은 쪽지를 보자마자  '아 뭐야~' 했다. 그게 끝이었다. 그래서 나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쪽지의 내용이 자꾸 떠올랐다. 밥을 먹을 때도, 하교길에도,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을 볼 때도 계속. 니 가슴 존나 덜렁거린다, 니 가슴 존나 덜렁거린다하고. 메아리치는 이 말의 끝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는건지, 왜 친구들은 가만히 있던건지.. 조용한 물음표만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지금이었으면 그러게 내 가슴은 존나 덜렁거리기라도 하지 니 고추는 작아서 덜렁거리기는 하니? 존나 작아서 평소에 없는 것 같겠다? 하고 쏘아 붙였을지 아니면 곧장 가서 범인을 색출한 다음 뺨을 후려갈겼을지 모를 일이지만 당시에는 큰 상처였다. 쪽지를 받은 당사자도 아니고, 내 가슴은 작아서 덜렁거리지 않는데도 그랬다. 왜 저런 말을 하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유를 찾기 어려운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혐오였다.

    스무살이 되어서는 노래방에서 고등학교 동창에게 강간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신입생 오티 땐 산책을 하자며 날 데리고나간 선배가 다짜고짜 키스를 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시험 기간에 안경을 쓰고 도서관에 가면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가 와서 '너 안경 쓰는거 최악'이라고 말했고, 나름 꾸미고 간 날엔 '아주 화장을 떡칠을 했네 누구한테 잘보이려고'란 말을 들었으며, 살이 살짝 비치는 얇은 검은스타킹을 신고 간 날엔 동기에게 '그런 스타킹 신은 애들 좀 싸보이더라' 같은 말을 들어야했다. 이 뿐이랴. 남자애들 여럿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선 자주 웃으면 쉬운 여자애로 소문이 났고 정색하고 앉았으면 매력이 없단 소릴 들었다. 키가 좀만 컸으면 인기 좋았을텐데, 종아리가 좀 더 얇았으면 생머리였으면 얼굴이 좀 더 갸름했으면 기타 등등의 헛소리도 매일 같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치지 않는게 다행일 정도였다.

    당시 함께 지내던 룸메이트가 여성만 가입가능한 '여성시대'라는 커뮤니티를 알려줬다. 가입 절차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막상 가입해서 활동하다보면 꿀잼이라고 했다. 룸메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까다로운 인증 절차를 거쳐 가입한 여시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에스트로겐의치명적유혹(에트) 게시판에는 매일 같이 청순/섹시해보이는 화장법, 좋은 화장품 추천, 쇼핑몰 추천, 코디 방법 등의 정보글이 올라왔고 여시테크토닉1) 게시판에는 남자를 사로잡는 방법, 흥분시키는 방법 등이 올라왔다. 리젠2)이 빨라서 하루종일 카페 글을 봐도 새 글이 줄지를 않았다. 나는 이 커뮤니티에서 '곰돌이 세마리'3) 따위의 스킬을 배워 남자친구에게 써먹기도 했고, 에트방에 올라온 화장품을 사는 데에 용돈과 알바비를 탕진했다.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1) 활동한 지 오래라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데, 잘못된 정보라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2) 게임에서 체력이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커뮤니티에서는 새 글이 올라오는 속도를 리젠이라고 함.
3) 곰 : 곰돌이 한마리가
돌 : 돌아다니다가
이 : 이렇게 [쪽]
세 : 세번더 [쪽]
마 : 마지막으로 [쪽]
리 : 리플레이 [쪽] (죄송합니다.....쓰다보니 너무 수치스럽네요..)

댓글 1개:

사과집 :

악 악 악 마지막 문단 내용 다 알고 곰돌이 세마리도 알기 때문에 죽을것 같다 ...ㅇ<-<